KOREAN POP ARCHIVE | ARTISTS | 김수철 2부작 ②
「젊은 그대」로 정상에 오른 뒤, 왜 그는 돈이 안 되는 음악으로 향했을까요?
1편에서 작은거인의 ‘일곱 색깔 무지개’를 따라갔다면, 2편의 김수철은 조금 다른 사람입니다. 기타를 잘 치는 밴드 리더를 넘어 노래를 쓰고 편곡하고 직접 연주하며, 영화 한 편의 분위기와 국제행사의 거대한 장면까지 설계하는 음악가가 됩니다.
그 변화는 갑자기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1981년 작은거인 2집에서 김수철은 기타와 보컬뿐 아니라 베이스까지 맡았습니다. 밴드의 한 파트를 연주하는 사람에서 곡 전체의 소리를 책임지는 사람으로 이미 이동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김수철은 장르를 바꿔가며 방황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기타에서 시작해 “내가 만들 수 있는 음악의 범위”를 계속 넓혀간 사람이었습니다.
1983년 ‘못다 핀 꽃 한 송이’, 고별 음반이 출발점이 되다
김수철의 솔로 1집은 처음부터 대형 가수의 탄생을 노리고 만든 음반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음악 활동에 대한 집안의 반대가 강해지면서 사실상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만들었다고 여러 인터뷰에서 회고했습니다.
그런데 ‘못다 핀 꽃 한 송이’가 크게 히트했습니다. ‘내일’과 ‘별리’도 함께 사랑받았습니다. 솔로 가수가 됐지만 작은거인의 흔적은 남아 있었습니다. 노래가 감성적으로 흐르다가 기타가 앞으로 나오고, 후반부에는 밴드 전체가 감정을 밀어 올립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여전히 “밴드가 어떻게 소리를 낼 것인가”가 중요했습니다.
1984년 ‘젊은 그대’, 쉬운 멜로디와 록의 힘
이듬해에는 ‘젊은 그대’, ‘나도야 간다’, ‘왜 모르시나’가 연달아 사랑받았습니다. 김수철은 1984년 KBS 가수왕에 오르며 대중가수로서 정상에 섰습니다.
‘젊은 그대’는 그의 성격을 잘 보여줍니다. 누구나 한 번에 따라 부를 만큼 멜로디는 단순하고 힘이 있지만, 밑에서는 기타와 리듬이 계속 곡을 앞으로 밀어냅니다. 작은거인 시절에 찾은 ‘쉬운 멜로디 + 록 편곡’이 가장 대중적인 형태로 완성됐습니다.
‘나도야 간다’는 영화 《고래사냥》과 함께 김수철을 또 다른 영역으로 데려갔습니다. 그는 영화에 출연하고 음악도 맡았습니다. 이후 그의 경력에서 영화음악이 큰 축으로 자리 잡는 출발점이었습니다.
초기 활동 사진은 무단 복제하지 않고 김수철 공식 홈페이지와 SBS 원문으로 연결합니다.
정상에 오른 뒤, 대중가요로 번 돈을 국악에 썼다
보통 이 정도로 성공하면 히트곡과 비슷한 노래를 더 만들고 방송 활동을 늘립니다. 김수철은 반대편으로 갔습니다. 대중가요로 번 돈을 국악을 공부하고 녹음하는 데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서양 록은 좋아하고 연주하면서 정작 자기 나라의 소리를 잘 모른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는 것입니다. 우리 소리를 현대의 언어로 만들어 세계인이 들을 수 있게 하겠다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결과만 보면 낭만적이지만 당시에는 무모한 선택에 가까웠습니다. 국악 음반은 제작비가 많이 들고 판매는 크지 않았습니다. 김수철은 훗날 국악 작업에 전 재산을 쏟고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고도 털어놓았습니다. 인기 절정의 가수가 번 돈을 다시 ‘팔릴지 모르는 음악’에 넣은 것입니다.
전기기타로 산조를 연주한다는 생각
김수철의 국악 작업에서 가장 김수철다운 결과물은 ‘기타산조’입니다. 산조는 진양조처럼 느린 장단에서 시작해 중모리·중중모리·자진모리·휘모리로 점차 빨라지며 절정으로 향하는 전통 기악 형식입니다.
김수철은 이를 전기기타로 표현했습니다. 국악기의 소리를 흉내 내는 데 그치지 않고, 전기기타의 벤딩과 비브라토, 강한 음색을 이용해 우리 가락과 장단을 풀어냈습니다.
공식 기록에 따르면 실험은 1980년 소형영화 《탈》의 음악에서 시작됐습니다.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전야제에서 대중에게 처음 본격적으로 선보였고, 1987년 중앙국악관현악단 공연에서 ‘기타산조’라는 이름으로 소개됐습니다.
김수철이 국악을 최초로 현대화했다고 넓게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는 자신이 만든 기타산조를 중심으로, 우리 음악을 현대 악기와 무대에 연결하는 작업을 오랫동안 이어온 선구적인 음악가입니다.
1988 서울올림픽, 한 장면 전체를 음악으로 만들다
김수철의 실험은 개인 음반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전야제 음악에 이어 1988년 서울올림픽 전야제에서는 음악감독과 작곡을 맡았습니다.
그는 우리 고유의 소리와 당시 첨단 악기였던 신시사이저를 섞었습니다. 사물놀이와 전자음향, 대규모 퍼포먼스가 한 무대에서 만났습니다. 대중가요 가수가 국가적인 국제행사의 장면 전체를 음악으로 설계하는 위치까지 간 것입니다.
이 지점부터 김수철을 ‘히트곡 많은 가수’라는 말로만 설명하기 어려워집니다. 가수와 기타리스트, 작곡가와 편곡가를 넘어 음악감독이 됐기 때문입니다.
1989 《ONE MAN BAND》, 정말 혼자 연주했다
1989년에는 김수철의 음악 인생을 압축한 듯한 《ONE MAN BAND》가 나왔습니다. 지금은 컴퓨터로 드럼과 베이스, 건반을 찍어 혼자 곡을 만드는 일이 흔하지만, 이 음반의 ‘원맨밴드’는 의미가 달랐습니다.
김수철 공식 프로필은 이 음반을 국내 최초의 ‘ONE MAN BAND’ 앨범으로 소개합니다. 기계로 악기를 대신한 것이 아니라, 작사·작곡·편곡에 더해 드럼·건반·기타 등 실제 악기를 김수철이 직접 연주해 녹음했다는 뜻입니다.
작은거인 2집에서 기타·보컬·베이스까지 맡았던 사람이 이제 드럼과 건반까지 직접 연주했습니다. ‘기타리스트에서 밴드 전체를 설계하는 사람으로’라는 변화가 이 음반에서 완성됩니다.
화면 뒤로 숨어도 김수철의 음악은 들렸다
김수철은 《고래사냥》 이후 《그들도 우리처럼》, 《서편제》, 《태백산맥》 등 영화음악에서도 큰 흔적을 남겼습니다.
특히 《서편제》는 상징적입니다. 오랫동안 국악을 공부한 뒤 만든 영화음악으로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음악상과 MBC 최우수 영화음악상을 받았습니다. 《태백산맥》으로는 청룡영화상과 대종상 음악상을 받았습니다. 기타 솜씨나 노래 실력보다 화면 속 인물의 감정과 시대의 공기를 음악으로 만드는 능력이 중요해진 것입니다.
1990년 애니메이션 《날아라 슈퍼보드》 주제가도 김수철의 작품입니다. 어린이 만화 주제가와 《서편제》의 영화음악을 같은 사람이 만들었다는 사실이 그의 세계를 가장 쉽게 설명합니다. 장르보다 필요한 음악을 자기 방식으로 만드는 사람이었습니다.
2002 월드컵, 결국 ‘우리 소리’로 세계 무대에 가다
기타산조는 1988 서울올림픽, 1993 대전엑스포, 1997 동계유니버시아드, 1998 대통령 취임식 등 여러 무대에서 이어졌습니다. 2002 한일월드컵 개막식과 조 추첨 행사에도 김수철의 음악이 사용됐습니다.
전통을 그대로 보존하는 일과는 조금 다른 길이었습니다. 전통의 장단과 정서를 현대 악기와 음향으로 다시 만들어 세계인이 들을 수 있게 하려는 작업이었습니다. 지미 헨드릭스와 제프 벡을 들으며 기타를 익힌 청년이 같은 전기기타로 산조를 연주하게 된 것입니다.
김수철 2부작, 한눈에 정리
- 1978~1981: 작은거인의 기타리스트·보컬에서 곡 전체를 설계하는 연주자로 성장
- 1983: 솔로 1집 ‘못다 핀 꽃 한 송이’·‘내일’·‘별리’ 히트
- 1984: ‘젊은 그대’·‘나도야 간다’로 정상에 오르고 영화음악 영역으로 확장
- 1986~1987: 아시안게임에서 기타산조 공개, 중앙국악관현악단 공연에서 명명
- 1988: 서울올림픽 전야제 음악감독·작곡, 국악과 현대음향 결합
- 1989: 실제 악기를 직접 연주한 국내 최초 《ONE MAN BAND》 음반 발표
- 1990년대 이후: 《서편제》·《태백산맥》 영화음악과 국제행사 음악으로 활동 영역 확대
- 2002: 한일월드컵 개막식 음악과 《기타산조》 음반으로 세계 무대에 우리 소리 제시
그래서 김수철은 무엇으로 불러야 할까?
가수라고 하기에는 영화음악과 행사음악이 너무 많습니다. 기타리스트라고 하기에는 작곡과 편곡의 영역이 너무 넓고, 국악인이라고 하기에는 출발점이 록입니다. 음악감독이라고 부르면 또 ‘젊은 그대’와 ‘나도야 간다’를 다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김수철에게는 그냥 ‘아티스트’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립니다. 필요하면 드럼과 건반을 치고, 국악을 연구하며, 영화 화면을 보면서 음악을 만들고, 수백 명이 움직이는 행사의 소리를 설계했습니다.
중심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남들이 이미 잘하는 음악을 반복하기보다 “우리에게 아직 없는 소리가 무엇일까?”를 계속 찾았습니다. 기타 하나로 시작했지만 결국 대중가요와 국악, 영화음악이 모두 김수철의 ‘자기 음악’이 됐습니다.
함께 읽기: 작은거인의 김수철 1편 · 1970년대 후반 밴드 폭발의 시대 · 산울림
참고 자료
- 김수철 공식 홈페이지 — 주요 경력과 ONE MAN BAND·영화·행사음악
- 김수철 공식 홈페이지 — 기타산조의 역사
- SBS 뉴스 — 뮤지션 김수철의 40년 여정 ④: 김수철 음악 따라잡기
- 예스24 — 《김수철 기타산조》 음반과 기타산조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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