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9.02 · ERA

1970년대 후반, 왜 한국에 밴드들이 쏟아져 나왔을까?

1977년 대학가요제, 산울림의 등장, 사랑과 평화, 활주로, 작은거인, 마그마까지. 1970년대 후반 한국 밴드가 한꺼번에 등장한 이유를 시대 흐름으로 쉽게 풀어본다.

KOREAN POP ERA / 03

산울림에서 작은거인·활주로·마그마까지, 무대가 바뀌자 음악도 바뀌었습니다.

한국 밴드의 역사를 시대순으로 따라가다 보면 1977년 무렵부터 이름이 갑자기 많아집니다. 산울림이 나오고 사랑과 평화가 등장합니다. 대학가요제에서는 샌드페블즈와 활주로가 전국적인 관심을 받았고, 뒤이어 김수철의 작은거인과 마그마가 나타납니다.

불과 몇 년 사이에 벌어진 일입니다. 그렇다면 그때 젊은 사람들이 갑자기 기타를 잘 치게 된 걸까요? 물론 아닙니다. 이미 미8군 무대와 클럽, 대학가에는 밴드 음악을 연주하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달라진 것은 그 음악이 대중 앞으로 나올 수 있는 통로였습니다.

밴드 음악은 1977년에 갑자기 시작되지 않았다

1970년대 초반의 청년문화를 설명할 때 흔히 청바지·통기타·생맥주를 함께 이야기합니다. 송창식, 양희은, 어니언스 같은 포크 음악이 젊은 세대의 감성을 대변했고, 다른 한편에서는 키보이스·히식스·데블스 같은 그룹사운드가 전기기타와 드럼의 소리를 들려주고 있었습니다.

그보다 앞선 미8군 무대에서는 국내 연주자들이 서구의 록, 소울, 리듬앤블루스를 실제 무대에서 익혔습니다. 그러므로 ‘한국 밴드가 1977년부터 시작됐다’고 말하면 앞선 역사를 놓치게 됩니다. 자세한 출발점은 한국 록은 어디에서 시작됐을까?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만 1970년대 중반 대마초 파동과 공연·방송 규제로 여러 음악인의 활동이 제약됐고, 기존 청년문화의 한 축도 흔들렸습니다. 그 뒤 새로운 얼굴과 새로운 형식이 등장할 공간이 생겼습니다.

1977년 대학가요제, 무명 대학생에게 전국 무대가 생기다

1977년 9월 3일 제1회 MBC 대학가요제가 열렸습니다. 지금 보면 익숙한 경연 프로그램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당시에는 의미가 달랐습니다. 음반사에 발탁되거나 유명 작곡가의 곡을 받아야 대중 앞에 설 수 있던 시대에 대학생이 직접 만든 노래와 직접 꾸린 밴드로 전국 방송에 나갈 수 있는 문이 열린 겁니다.

첫 대회의 대상은 서울대 밴드 샌드페블즈의 ‘나 어떡해’였습니다. 이 곡을 만든 사람은 산울림의 김창훈이었습니다. 대학 밴드가 만든 록 음악이 전국적인 히트곡으로 이어지는 장면이 첫 회부터 만들어졌습니다.

이듬해 제2회 대회에서는 항공대 밴드 활주로가 ‘탈춤’으로 은상을 받았습니다. 1980년 제4회 대회에서는 마그마가 ‘해야’로 은상을 받았습니다. 대학가요제는 밴드 붐의 유일한 원인은 아니었지만, 대학 안의 창작과 연주가 대중음악계로 이어지는 가장 상징적인 공개 통로가 됐습니다.

1977년 산울림, 전문 연주자의 문법 밖에서 나오다

같은 해 김창완·김창훈·김창익 삼형제의 산울림은 1집 《아니 벌써》를 발표했습니다. 이들은 전문 세션 연주자들이 모인 팀이라기보다 집에서 함께 곡을 만들고 연주하던 가족 밴드에 가까웠습니다.

삼형제는 원래 ‘무이’라는 이름으로 제1회 대학가요제에 도전했지만, 김창완이 졸업생이라는 이유로 본선에 나가지 못했습니다. 이후 음반으로 세상에 나온 ‘아니 벌써’의 기타와 녹음은 당시 기성 가요처럼 매끈하게 정돈돼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낯선 질감이 새로운 개성이 됐습니다.

산울림의 등장은 전문 작곡가가 만든 노래를 가수가 부르는 방식만이 음반의 정답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줬습니다. 스스로 곡을 만들고 자기 방식으로 연주한 소리도 대중의 선택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김창완·김창훈·김창익 삼형제의 초창기 산울림 사진이 사용된 공식 Spotify 아티스트 프로필. 사진 파일을 복제하지 않고 Spotify 공식 임베드로 표시합니다.

1978년 사랑과 평화, 이번에는 연주자들이 전면에 서다

산울림이 독창적인 창작 방식으로 놀라게 했다면, 사랑과 평화는 전혀 다른 이유로 충격을 줬습니다. 미8군과 클럽에서 단련된 연주자들이 만든 정교한 합주였습니다.

1978년 1집 ‘한동안 뜸했었지’에서는 소울과 Funk, 디스코, 록과 재즈의 감각이 섞였습니다. 기타와 베이스, 드럼, 키보드가 각자 적극적으로 움직이면서도 하나의 그루브로 붙었습니다.

산울림과 사랑과 평화가 같은 시기에 사랑받았다는 사실은 이 시기의 밴드 붐이 하나의 스타일만 유행한 사건이 아니었음을 보여줍니다. 전자의 거칠고 독창적인 창작과 후자의 숙련된 합주가 동시에 대중에게 받아들여졌습니다. 사랑과 평화의 밴드사는 사랑과 평화 1부, 장르 해설은 한국 Funk의 시작에서 이어집니다.

1978년 사랑과 평화 1집 전체 음반 자료. 최이철(기타·보컬)과 김명곤(키보드·색소폰)이 실제 녹음에 참여한 원년 음원입니다. 당시 두 사람이 함께 등장하는 방송 실황의 공식 공개본은 확인되지 않아, 후대 구성원의 공연 영상 대신 원년 녹음을 사용했습니다.

작은거인, 쉬운 멜로디와 거친 기타 사이의 답

김수철도 이 흐름에서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는 대학 입학 뒤 밴드를 꾸려 활동했고 1978년 겨울 작은거인을 결성했습니다.

김수철은 인터뷰에서 대학가요제 예선에서 강한 록 기타를 연주했다가 탈락한 경험을 이야기했습니다. 이후 처음부터 어려운 록으로 밀어붙이기보다 멜로디는 쉽게 만들고 편곡은 록으로 가져가는 방법을 고민했습니다.

이 일화는 당시 젊은 밴드의 숙제를 잘 보여줍니다. 자신들이 좋아하는 록을 그대로 연주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한국어 노래와 대중적인 멜로디에 어떻게 연결할지 각자의 답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실제 밴드 작은거인의 1979년 1집 《작은 거인의 넋두리》 2면 음원. 김수철·김근성·정원모·최수일의 4인조 시기 음반이며, 플레이어는 5번 곡 ‘나에게로’가 시작되는 13분 1초부터 재생됩니다. 일부 기억과 달리 음반에 적힌 곡명은 ‘나’가 아니라 ‘나에게로’입니다.

활주로와 마그마, 대학 무대가 하나의 생태계가 되다

대학가요제가 인기를 얻자 교내 그룹사운드와 축제, 여러 경연 무대가 서로 연결됐습니다. 여기서 이름을 알린 음악가들이 졸업 뒤 프로 무대로 이동하는 흐름도 만들어졌습니다.

활주로의 ‘탈춤’과 마그마의 ‘해야’를 나란히 들으면 같은 대학가요제 출신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색깔이 다릅니다. ‘탈춤’은 한국적 리듬과 록을 연결했고, ‘해야’는 더 무겁고 강한 하드록으로 나아갔습니다.

활주로는 배철수를 중심으로 다른 항공대 밴드와 합쳐져 송골매로 이어졌습니다. 이후 무당, 송골매, 들국화, 시나위, 백두산 같은 팀을 따라가면 이 시기의 여러 실험이 1980년대 록과 헤비메탈의 토대 가운데 하나가 됐음을 볼 수 있습니다.

MBC 자료는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조건에 따라 사진을 복사하지 않고 방송사 원문으로 연결합니다.

밴드가 많아진 이유는 악기보다 기회였다

1970년대 후반에 갑자기 기타와 드럼이 생긴 것도, 연주자가 처음 나타난 것도 아닙니다. 변화의 조건은 크게 세 가지였습니다.

대중의 귀도 달라지고 있었습니다. 포크와 트로트뿐 아니라 전기기타가 크게 울리고 베이스와 드럼이 앞으로 나오는 음악을 들을 준비가 되어 갔습니다.

1977~1980, 불과 네 해 동안 벌어진 일

이 시기는 누군가 하나의 장르를 완성한 때가 아닙니다. 앞으로 수십 년 동안 갈라져 나갈 여러 길이 동시에 열린 때였습니다.

이제 지도 위의 밴드를 하나씩 만나볼 차례

이 글은 각 밴드의 음악을 깊게 파고들기보다 시대의 지도를 펼쳐놓았습니다. 앞으로 산울림의 낯설고 독창적인 록, 김수철과 작은거인의 거친 기타, 활주로와 마그마가 보여준 대학 밴드의 다양성을 차례로 확대해 볼 수 있습니다.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는 어느 날 갑자기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문을 조금 열어놓으면 다음 사람이 그 문을 더 크게 열었습니다. 1970년대 후반은 그런 문들이 한꺼번에 열리기 시작한 시간이었습니다.

1970년대 후반, 한국 밴드는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니라 대중 앞으로 나올 큰 무대를 얻기 시작했습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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