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9.02 · ARTISTS

산울림 —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은 방식으로 록을 만들다

김창완·김창훈·김창익 삼형제가 만든 산울림. ‘무이’와 대학가요제 예선, 1977년 ‘아니 벌써’, 거친 퍼즈 기타와 독창적인 사운드가 한국 록을 어떻게 바꿨는지 따라가 본다.

KOREAN POP ARCHIVE | ARTISTS 05 | KOREAN BAND LEGACY 03

삼형제가 집에서 만든 음악이 1977년 한국 가요계를 뒤집어놓은 순간

연주는 매끈하지 않았고 녹음도 깨끗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주류 가요처럼 정교하게 다듬어진 제작물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 거칠고 낯선 소리가 오히려 새로운 기준이 됐습니다. 1977년 김창완·김창훈·김창익 삼형제가 내놓은 산울림 1집 《아니 벌써》 이야기입니다.

산울림은 한국 최초의 록 밴드가 아닙니다. 그들보다 앞서 미8군 무대와 그룹사운드의 긴 역사가 있었습니다. 산울림이 특별했던 이유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 기존 음악계에서 배운 공식을 잘 재현한 것이 아니라, 세 형제가 자기들끼리 곡을 만들고 연주하면서 어디에도 없던 음악 문법을 만들어버렸다는 점입니다.

김창완·김창훈·김창익 삼형제가 함께한 산울림의 공식 Spotify 프로필. 초창기 세 멤버 사진을 파일로 복제하지 않고 공식 플레이어로 표시합니다.

1977년, 이런 소리가 음반이 될 수 있었을까?

산울림의 데뷔 음반을 처음 들으면 가장 먼저 기타가 귀에 걸립니다. 퍼즈를 깊게 건 기타는 뭉개지고 갈라지며, 오르간은 묘한 공간을 만들고, 베이스와 드럼은 정돈된 세션 연주와 다른 원초적인 추진력을 냅니다. 김창완의 목소리도 당시 가요계가 기대하던 힘 있는 정통 창법과 거리가 멀었습니다.

이 소리를 단순히 ‘연주를 못해서 나온 결과’라고만 보면 핵심을 놓칩니다. 세 형제는 프로 음악인이 되기 위한 교육이나 기성 제작 시스템의 규칙에서 자유로웠습니다. 무엇을 하면 안 되는지 충분히 배우지 않았기에, 자신들이 재미있다고 느끼는 방식으로 곡의 길이와 악기 소리, 노랫말을 결정할 수 있었습니다. 산울림의 아마추어리즘은 부족함의 다른 이름이 아니라 규칙 밖에서 움직일 수 있는 자유에 가까웠습니다.

김창완이 기타를 잡자 두 동생이 따라왔다

1971년 대학에 들어간 김창완이 기타를 잡았고, 뒤이어 김창훈은 베이스, 김창익은 드럼을 마련했습니다. 큰형 김창완이 보컬과 기타, 둘째 김창훈이 베이스, 막내 김창익이 드럼을 맡은 삼형제 밴드의 기본 형태가 이렇게 만들어졌습니다.

누가 정해준 커리큘럼을 따라가기보다 집에서 함께 연주하고 곡을 쌓았습니다. 형제이기에 가능한 거리감도 있었습니다. 서로의 취향을 잘 알면서도 눈치를 덜 보고, 떠오른 생각을 즉시 합주로 옮겼습니다. 산울림의 음악에 장난기와 기묘한 긴장감이 함께 흐르는 이유도 이 출발점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무이’와 대학가요제, 본선 대신 음반으로

삼형제는 처음부터 산울림이라는 이름으로 음반 데뷔를 준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무이’라는 이름으로 1977년 제1회 MBC 대학가요제에 도전했지만, 김창완이 이미 졸업생이어서 본선 무대에 설 수 없었습니다.

대신 김창훈이 만든 ‘나 어떡해’는 서울대 밴드 샌드페블즈를 통해 대회 대상을 받았습니다. 삼형제에게는 자신들이 만든 곡이 대중과 만날 수 있다는 강한 신호였습니다. 이들은 음반 제작으로 방향을 돌렸고, 같은 해 1집 《아니 벌써》를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대학가요제와 밴드 붐이 어떻게 연결됐는지는 1970년대 후반, 왜 한국에 밴드들이 쏟아져 나왔을까?에서 시대 흐름으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거칠어서 좋았던 것이 아니라, 거친 소리로 완성했다

산울림 초기 음악의 핵심은 단순히 녹음 상태가 나빴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뭉개지는 퍼즈 기타, 반복되는 베이스, 직선적인 드럼, 오르간과 목소리가 서로 부딪히며 하나의 분위기를 만들었습니다. ‘아니 벌써’의 들뜬 속도와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의 나른한 정서는 같은 음반 안에서도 완전히 다른 세계를 보여줍니다.

가사는 또 어떻습니까. 거창한 선언 대신 문을 열어달라고 말하고, 여름이 지나가는 기분을 중얼거리며, 일상의 작은 감정을 동화처럼 꺼냅니다. 음악은 사이키델릭한데 말은 어렵지 않습니다. 이 충돌이 산울림을 낯설면서도 친근하게 만들었습니다.

1977년 1집 수록곡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 1집 표지와 음원은 공식 Spotify 임베드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록 밴드인데 동요와 포크, 발라드도 했다

산울림을 퍼즈 기타가 강한 초기 록 밴드로만 기억해도 절반입니다. 이들은 사이키델릭 록과 포크, 발라드, 동요를 자연스럽게 오갔습니다. 어린이의 말처럼 단순한 문장과 실험적인 소리를 한 곡 안에 넣기도 했습니다.

장르를 바꿀 때마다 산울림의 정체성이 사라지지도 않았습니다. 조금 엉뚱한 시선, 쉽게 흉내 내기 어려운 멜로디, 김창완과 김창훈이 각자 만든 곡의 다른 결이 계속 남았습니다. ‘록은 반드시 이렇게 해야 한다’는 규칙보다 자기들다운 노래인지가 먼저였기 때문입니다.

1집·2집·3집, 짧은 시간에 세계를 넓히다

산울림은 1977년 1집에 이어 1978년 2집과 3집을 빠르게 발표했습니다. 세 음반은 흔히 산울림 초기 3부작으로 함께 거론되지만 각자의 표정은 다릅니다.

앨범 표지와 음원은 권리자가 유통한 공식 리마스터 Spotify 플레이어로 표시하며, 이미지를 별도 저장하거나 재배포하지 않습니다.

산울림이 후배들에게 남긴 것은 연주법보다 태도였다

산울림 이후 모든 밴드가 퍼즈 기타를 따라 한 것은 아닙니다. 더 오래 남은 영향은 ‘우리 방식으로 만들어도 된다’는 태도였습니다. 완벽한 장비와 제도권의 승인을 기다리기보다, 가진 악기로 곡을 만들고 자기 목소리로 발표하는 선택입니다.

그 점에서 산울림은 훗날 인디 음악이 중요하게 여긴 자작·자연주와 독립적인 감각을 훨씬 앞서 보여준 밴드였습니다. 같은 시대에 신중현과 뮤직파워는 숙련된 록의 힘을, 사랑과 평화는 정교한 Funk 합주를 들려줬습니다. 서로 다른 방식이 함께 존재했기에 한국 밴드의 지형도 넓어졌습니다.

함께 읽기: 신중현과 뮤직파워 · 사랑과 평화 1부 · 사랑과 평화 2부

2008년 이후, 산울림과 김창완밴드는 다르다

2008년 막내 김창익이 세상을 떠난 뒤 김창완은 “더 이상의 산울림은 없다”고 밝혔습니다. 지금 무대에서 산울림의 노래를 부르는 김창완의 모습과 삼형제가 함께한 산울림을 같은 밴드의 현재형으로 처리해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

김창완은 이후 김창완밴드로 활동하며 산울림의 음악을 새롭게 이어가고 있지만, 역사 속 산울림은 김창완·김창훈·김창익 세 형제가 함께 만든 밴드입니다. 초창기 산울림을 소개할 때 현재의 김창완 단독 사진이나 김창완밴드 사진만 사용하는 것은 사실을 충분히 전달하지 못합니다.

잘 연주하는 록에서, 자기 음악을 만드는 록으로

산울림 이전에도 한국에는 뛰어난 록 연주자와 밴드가 있었습니다. 산울림의 등장은 그 역사를 지우지 않습니다. 대신 록을 평가하는 질문을 하나 더 만들었습니다. “얼마나 잘 연주하는가?”뿐 아니라 “얼마나 자기만의 음악인가?”를 묻게 한 것입니다.

거친 소리는 약점이 아니라 개성이 됐고, 집에서 시작한 삼형제의 놀이는 한국 대중음악의 중요한 유산이 됐습니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은 방식이었기에 누구와도 다른 음악이 나왔습니다.

산울림은 록을 ‘배운’ 밴드라기보다, 자기들끼리 놀다가 자기만의 록을 만들어버린 밴드였습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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