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S | KOREAN BAND LEGACY 02-2
히트곡 ‘울고 싶어라’ 뒤에는, 연주자들이 만든 한 장의 깊고 넓은 앨범이 있었습니다.
사랑과 평화의 1집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곡은 ‘한동안 뜸했었지’입니다. 하지만 이 밴드의 진짜 매력은 한 곡의 성공만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멤버가 바뀌고 시대가 달라져도, 사랑과 평화의 중심에는 늘 ‘연주’가 있었습니다.
이번 편에서는 1979년 2집에 합류한 송홍섭, 초창기 사운드의 중요한 축이었던 김명곤과 김태흥, 그리고 오랜 공백을 지나 1988년에 발표한 3집 《사랑과 평화 Vol.1》을 따라갑니다.
송홍섭이 더한 움직이는 베이스
송홍섭은 1집 멤버가 아니라 1979년 2집 《뭐라고 딱 꼬집어 얘기할 수 없어요》에서 베이스로 합류했습니다. 그의 베이스는 노래 아래에서 뿌리음만 받치는 방식과 거리가 멉니다. 리듬 사이를 파고들고, 때로는 기타와 건반에 맞서며 곡 전체를 앞으로 밀어냅니다.
한국대중음악상 공로상 소개문도 이 2집에서 최이철의 블루지한 기타, 김명곤과 이근수의 건반, 송홍섭의 베이스가 드러낸 음악적 자신감을 짚습니다. 사랑과 평화가 ‘노래 잘하는 밴드’를 넘어 ‘연주를 듣게 만드는 밴드’였다는 사실이 선명해지는 시기입니다.
김명곤과 김태흥, 초창기 사운드의 두 축
건반 연주자이자 편곡가였던 김명곤은 사랑과 평화의 소리를 세련되게 만든 핵심 인물입니다. 기타와 베이스가 촘촘한 리듬을 만드는 동안 건반은 화음과 질감을 넓혔습니다. 그는 훗날 여러 가수의 작업에서도 작곡과 편곡 역량을 보여주며 한국 대중음악의 중요한 제작자로 자리 잡았습니다.
드러머 김태흥 역시 밴드의 그루브를 지탱한 원년 멤버였습니다. 단순히 박자를 세는 것이 아니라 베이스와 맞물려 사랑과 평화 특유의 탄력 있는 리듬을 만들었습니다. 1983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그의 부재는 밴드에 큰 손실이었습니다.
1988년, 사랑과 평화가 다시 모이다
긴 공백 뒤 사랑과 평화는 1988년 8월 30일 3집 《사랑과 평화 Vol.1》을 발표했습니다. 최이철과 이남이를 중심으로 한정호, 최태일, 이병일 등이 참여했고, 소울과 블루스, 퓨전과 팝이 한 앨범 안에서 자연스럽게 만났습니다.
대중적으로 가장 크게 알려진 곡은 ‘울고 싶어라’였습니다. 하지만 이 앨범의 가치는 히트곡 하나에 머물지 않습니다. ‘노래는 숲에 흐르고’, ‘작은 손 모두어’, ‘겨울 바다’, ‘한문과 한글 (경음악)’, ‘어머님의 자장가’로 이어지는 흐름은 사랑과 평화가 여전히 연주자들의 밴드였음을 보여줍니다.
‘노래는 숲에 흐르고’ — 말보다 먼저 흐르는 기타
최이철의 기타에는 록, 블루스, 소울, 펑크의 감각이 함께 있습니다. 웨스 몽고메리나 벤처스 같은 연주자와 팀에서 받은 영향도 그의 음악적 배경을 이해하는 단서가 됩니다. 다만 특정 곡을 어느 한 스타일의 모방으로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노래는 숲에 흐르고’에서 기타는 목소리를 압도하지 않으면서도 곡의 방향을 이끕니다. 최이철이 ‘작은 손 모두어’와 함께 특히 아꼈다고 전해지는 곡이기도 합니다. 화려함을 과시하기보다 멜로디와 리듬이 함께 흘러가게 만드는 연주가 오래 남습니다.
‘작은 손 모두어’ — 밴드가 한 호흡으로 움직일 때
‘작은 손 모두어’는 개별 악기의 기교보다 합주의 균형에 귀를 기울이게 하는 곡입니다. 보컬과 기타, 건반, 베이스, 드럼이 서로 자리를 양보하면서도 빈틈을 만들지 않습니다. 사랑과 평화의 강점은 누군가의 긴 솔로가 아니라, 모두가 동시에 곡의 표정을 바꾸는 순간에 있습니다.
‘한문과 한글’ — 앨범 한가운데 놓인 경음악
‘한문과 한글’은 3집의 다섯 번째 트랙에 놓인 경음악입니다. 마지막 곡도 아니고, 단순한 기타 솔로 트랙으로 규정하기도 어렵습니다. 보컬 없이 악기만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오히려 각 연주자가 어떻게 대화하는지 더 잘 들립니다.
대중가요 음반에서 연주곡은 종종 곁가지처럼 취급되지만, 사랑과 평화에게는 밴드의 정체성을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방식이었습니다.
‘겨울 바다’ — 오래 남아 다시 불린 노래
‘겨울 바다’는 서늘한 풍경과 절제된 연주가 인상적인 곡입니다. 이후 김현식과 이승철 등 다른 가수들의 목소리로도 다시 불리며 생명력을 이어갔지만, 사랑과 평화 3집에 실린 버전이 이 곡의 중요한 출발점입니다.
‘어머님의 자장가’ — 첫 앨범의 기억을 다시 부르다
‘어머님의 자장가’는 1집에 수록됐던 노래가 3집에서 다시 등장한 경우입니다. 같은 노래를 다시 담았다는 사실은 단순한 재활용보다 밴드의 과거와 현재를 잇는 선택에 가깝습니다. 1978년의 사랑과 평화와 1988년의 사랑과 평화를 한 곡 안에서 비교해 들을 수 있습니다.
최이철, 밴드 밖에서도 이어진 연주자의 삶
최이철은 사랑과 평화의 기타리스트이자 보컬로 널리 기억되지만, 그의 활동은 밴드 안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오랜 세션 활동과 무대를 통해 수많은 음악가와 교류했습니다. 다만 확인되지 않은 개별 음반의 참여 여부까지 확대해 단정하기보다, 그가 긴 시간 현장에서 연주자의 삶을 이어왔다는 점에 주목하는 편이 정확합니다.
사랑과 평화가 ‘밴드들의 밴드’인 이유
사랑과 평화의 역사는 멤버 교체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변화가 약점만은 아니었습니다. 뛰어난 연주자들이 들어오고 나가며 소울, 펑크, 디스코, 블루스, 퓨전 재즈를 자기 방식으로 다시 조합했습니다.
한국대중음악상은 2023년 사랑과 평화에 공로상을 수여하며 이들을 ‘밴드들의 밴드’로 소개했습니다. 한 명의 스타보다 연주자들의 합을 중심에 둔 팀, 시간이 흘러도 무대 위 그루브로 존재 이유를 증명한 팀이라는 평가입니다.
한눈에 보는 사랑과 평화 2부
- 1979년: 송홍섭이 2집부터 베이스로 합류
- 1983년: 원년 드러머 김태흥이 교통사고로 별세
- 1988년: 3집 《사랑과 평화 Vol.1》 발표, ‘울고 싶어라’ 수록
- 앨범의 숨은 중심: ‘노래는 숲에 흐르고’, ‘작은 손 모두어’, 경음악 ‘한문과 한글’
- 이어진 노래: ‘겨울 바다’와 다시 녹음한 ‘어머님의 자장가’
- 2023년: 제20회 한국대중음악상 공로상 수상
히트곡 뒤에 남은 것
사랑과 평화 3집은 ‘울고 싶어라’의 성공으로 기억되지만, 앨범을 처음부터 끝까지 들으면 다른 풍경이 보입니다. 노래와 경음악, 익숙한 멜로디와 낯선 합주가 교차하며 한 시대의 연주자들이 무엇을 할 수 있었는지 들려줍니다.
사랑과 평화를 오래 기억하게 만드는 것은 결국 한 곡의 제목이 아니라, 악기들이 서로 듣고 반응하는 순간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지금도 ‘연주자들이 만든 밴드’, 그리고 ‘밴드들의 밴드’로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