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9.03 · ARTISTS

작은거인의 김수철 — ‘일곱 색깔 무지개’, 한국 록 기타가 갑자기 달라졌다

솔로 가수 이전의 김수철은 강렬한 록 기타리스트였다. 작은거인과 ‘일곱 색깔 무지개’를 중심으로 1970년대 말 김수철의 기타가 왜 새롭게 들렸는지 따라가 본다.

KOREAN POP ARCHIVE | ARTISTS | KOREAN BAND LEGACY 04

솔로 가수 김수철 이전, 무대 위에는 이미 무서운 기타리스트가 있었습니다.

‘못다 핀 꽃 한 송이’를 부르던 가수를 먼저 떠올린다면 작은거인 시절의 김수철은 꽤 낯설게 들릴지 모릅니다. 지금 김수철이라는 이름 뒤에는 ‘젊은 그대’, ‘나도야 간다’, 국악과 록을 접목한 작업까지 수많은 장면이 붙어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을 1970년대 말로 돌리면 첫인상은 조금 달랐습니다. 김수철은 무엇보다 기타를 치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주류 가요와 대학가 무대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들 만큼 강하고 빠르고 거친 록 기타를 치는 청년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한 곡으로 압축하면 작은거인의 ‘일곱 색깔 무지개’입니다. 친숙한 멜로디로 시작하지만 곡이 진행될수록 기타가 앞으로 튀어나옵니다. 기타 솔로는 반주를 잘하는 수준을 넘어 곡의 중심을 가져갑니다.

작은거인 ‘일곱색깔 무지개’. 오아시스레코드가 유통한 1981년 음원과 음반 이미지를 공식 Spotify 플레이어로 표시합니다.

듣기 전에 이것만: 보컬만 따라가지 말고 기타를 따로 들어보세요. 노래가 친숙한 멜로디로 갈 때도 기타는 계속 록의 긴장을 놓지 않습니다. 이 ‘쉬운 멜로디 + 강한 기타’가 작은거인 시절 김수철의 핵심입니다.

기타 교본도 없어 자기 방식으로 배웠다

김수철의 기타 이야기는 출발부터 특이합니다. 그는 어린 시절 TV에서 밴드 연주를 보고 기타에 빠졌고, 제대로 된 교본을 구하기도 어려워 음을 하나씩 눌러가며 독학했다고 회고했습니다.

고등학생 때 이미 주변에 기타를 잘 치는 학생으로 알려졌고, 1977년에는 자작곡 ‘내일’과 ‘야속한 사람’을 방송에서 연주하고 노래하며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가 영향을 받았다고 밝힌 음악가와 밴드의 이름을 보면 기타가 왜 그렇게 강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지미 헨드릭스, 제프 벡, 제임스 갱, 그랜드 펑크 레일로드, 딥 퍼플, 프랭크 자파, 핑크 플로이드. 당시 국내의 일반적인 가요보다 훨씬 무겁고 실험적인 록이었습니다.

처음부터 ‘대중가요 가수’가 되려고 기타를 든 것이 아니라, 록이 좋아 기타를 치다가 대중 앞으로 나온 사람에 가까웠습니다.

1978년 작은거인, 네 명이 모여 큰 힘을 내다

작은거인은 1978년 무렵 김수철을 중심으로 결성됐습니다. 김수철이 기타와 보컬, 김근성이 키보드, 정원모가 베이스, 최수일이 드럼을 맡은 4인조였습니다. 각 대학에서 연주하던 젊은 음악인들이 모여 겨울 동안 합숙하며 연습했습니다.

‘작은거인’이라는 이름도 작은 체구의 김수철 한 사람만을 뜻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김수철은 네 명의 작은 사람들이 모여 큰 힘을 발휘하자는 뜻이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실제 밴드 작은거인의 1집과 수록곡은 앞선 시대 글의 작은거인 음반 자료에서도 들을 수 있습니다. 그 글이 1970년대 후반 밴드 붐의 지도를 펼쳤다면, 이번에는 그 지도 속 김수철의 기타를 확대해 봅니다.

너무 헤비해서 떨어졌다, 그래서 입구를 바꿨다

김수철은 1978년 대학가요제와 해변가요제에 자신이 좋아하던 헤비한 사운드로 도전했다가 탈락했다고 본인 인터뷰에서 회고했습니다. 그렇다고 록을 포기한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음악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입구가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가 찾은 답은 명확했습니다. 멜로디는 쉽게 따라갈 수 있게 만들되, 편곡과 연주는 자신이 좋아하는 록으로 밀어붙이는 방식이었습니다. 이후 대학 축제 경연무대에서 ‘일곱 색깔 무지개’로 주목받았고, 이 흐름이 작은거인의 독집 음반 제작으로 이어졌습니다.

자료마다 당시 경연의 명칭과 연도 표기에 차이가 있어 특정 대회의 수상명을 하나로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김수철 본인이 설명한 핵심은 분명합니다. 무거운 록만으로는 문을 열지 못했고, 쉬운 멜로디와 강한 연주를 결합한 뒤 대중과 만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일곱 색깔 무지개’, 한국어 노래에 이런 기타가 들어왔다

오늘 이 곡을 다시 들어야 하는 이유는 수상 경력보다 연주에 있습니다.

이를 ‘한국 최초의 록 기타 스타일’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신중현을 비롯한 앞선 세대에도 뛰어난 기타리스트가 있었습니다. 다만 1970년대 말 주류 가요와 대학가 무대에서 이처럼 빠르고 공격적인 록 기타를 전면에 내세운 젊은 가수는 매우 드물었습니다.

SBS 기사에 수록된 초기 공연 사진과 영상은 무단 복제하지 않고 방송사 원문으로 연결합니다.

1집에서 2집으로, 기타는 더 무거워졌다

‘일곱 색깔 무지개’를 계기로 작은거인은 독집 음반을 발표했습니다. 1집에는 젊은 4인조 밴드의 에너지와 실험이 담겼지만, 김수철은 당시 녹음 기술이 자신들이 원한 강한 사운드를 충분히 담아내지 못했다고 아쉬워했습니다.

두 번째 음반을 만들 때는 드러머 최수일과 김수철만 남아 2인 체제가 됐습니다. 김수철은 보컬과 기타뿐 아니라 베이스까지 직접 맡아 소리를 더 무겁게 밀어붙였습니다. 1980년에 녹음을 마친 음반은 이듬해 발표됐습니다.

2집의 ‘새야’와 더 격정적으로 바뀐 ‘일곱 색깔 무지개’를 들으면 단순히 멤버 수가 줄어든 음반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김수철이 여러 악기와 곡 전체의 소리를 직접 설계하는, 훗날의 원맨밴드형 아티스트로 이동하는 장면이 이미 보입니다.

작은거인 김수철, 한눈에 보기

‘내일’과 ‘못다 핀 꽃 한 송이’에도 밴드의 흔적이 남았다

1983년 김수철은 솔로 1집으로 대중적인 스타가 됩니다. 그러나 ‘내일’과 ‘못다 핀 꽃 한 송이’를 자세히 들으면 작은거인과 완전히 끊어진 음악은 아닙니다. 기타가 노래의 감정을 끌어올리는 방식과 후반부로 갈수록 힘을 키우는 구성에는 록 밴드 시절의 감각이 남아 있습니다.

두 곡은 작은거인의 기타리스트와 솔로 아티스트 김수철 사이를 잇는 다리와 같습니다. ‘젊은 그대’와 ‘나도야 간다’, 원맨밴드식 제작, 국악과 영화음악으로 넓어지는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본격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김수철을 가수로만 기억하면 놓치는 것

김수철은 히트곡이 많은 가수입니다. 하지만 히트곡만 따라가면 중요한 출발점 하나를 놓칩니다. 그는 기타를 독학했고, 국내에서 접하기 어려웠던 해외 록을 찾아 들었으며, 자신이 좋아하는 헤비한 음악으로 경연에 나갔다가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대중과 만나는 방법을 스스로 다시 고민했습니다.

그 결과가 ‘일곱 색깔 무지개’였습니다. 록을 쉽게 만든 것이 아니라, 쉬운 멜로디 안에서도 록 기타의 힘을 잃지 않는 방법을 찾아낸 것입니다.

김수철은 대중에게 맞추기 위해 록을 버린 게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따라 부를 수 있는 멜로디 안에 자신이 좋아하던 강한 록 기타를 집어넣는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일곱 색깔 무지개’는 단순한 대학 밴드의 히트곡이 아니었습니다. 김수철이라는 기타리스트가 한국 대중음악 앞으로 걸어 나온 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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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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